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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개 특징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 분석

 

[무용총 수렵도]

 

 

아래 사진은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인데

최초 발견 당시 사진이라고 하고,

여기에는 무사들을 도와서 호랑이를 쫓는 사냥개 한 마리가 보입니다.

 

 

 

 

 

 

아래 사진은 최근의 사진인데,

훼손이 많이 됐지만

여기에도 사냥개로 보이는 검둥개가 보입니다.

 

 

 

그리고 아래 사진은 kbs에서 복원한 영상인데,

무사들의 활 시위가 모두 곧 맞출 듯 자기 앞에 짐승들을 겨누고 있는데,

저 검둥이는 조준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사냥할 대상이 아니라 사냥을 돕는 사냥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이 사실적인 벽화에서

고구려 시대에 이미 호랑이 잡는 사냥개가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일합병 이후 조선 땅에서 호랑이를 소탕할 때  풍산개가 맹위를 떨쳤다는 사실도 알고 있고요.

 

 

 

 

 

이 무용총 수렵도는

군사훈련을 겸한 

고구려의 [월동준비] 풍속도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집단 사냥에서 무사들이 모두 [명적]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명적[우는 화살] [소리나는 화살]이란 뜻으로 화살 앞부분에 '동물의 뼈로 구멍을 내서 만든 작은 통'을 달아서 화살이 날아갈 때 '삐이익'하고 고음의 피리 소리 같은 기분 나쁜 소리가 나게 하는 화살인데, 전쟁 시에는 적의 진영으로 날려보내 공포심을 유발시켜 혼비백산 적의 진영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합니다. 물론 명적에도 살상효과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 화살촉을 길게 하면 살상효과가 있으니까요.

 

그런 화살이 한꺼번에 수백 발 수천 발이 동시에 '삐익' '삐익' 괴음을 내면서 머리 위로 날아와 꽂히면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이재운의 [칭기즈칸]을 읽어보면 명적의 위력이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런 용도의 명적이 무용총 수렵도에 나와 있다는 것은 저 집단사냥이 군사훈련을 병행한 겨울철 [월동준비] 풍속이라는 것이지요. 저 수렵도에서 무사들이 화살 앞에 명적만 달고 화살촉을 안 달았다는 것은  저 무사들이 호랑이나 사슴이나 표범을 한 방에 죽이지 않고 지금 몰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삐익 소리를 내면서 화살이 날아와 엉덩이나 가슴에 맞으면 호랑이나 사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혼비백산 조지 빠져라고 도망갈 것 아닙니까? 만약에 저 무사들이 호랑이나 사슴을 한 방에 쏘아서 죽이려고 했다면 저 화살의 앞부분에 날카로운 화살촉이 달려 있어야 합니다. 겁을 줘서 쫓기 위해서 일부러 소리나는 명적만 달고 화살촉 없이 사냥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군사훈련입니다!

 

기마민족들은 초한지나 삼국지에 나오는 것처럼 몇 십만 명 대 몇 십만 명으로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인구 자체가 적었기 때문에요. 수나라 양제만 해도 고구려 침공 시 130만 명을 동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박살이 나서 결국 나라 자체가 없어지게 되었고요. 수 양제가 130만 명을 동원할 때 대부분이 농민들이었거나 보병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농사 짓는 사람들이 저 수렵도에 나오는 무사들하고 상대가 되겠습니까?

 

기마민족들의 전투 전술의 기본은 몰이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활로 도망가는 맹수들을 맞추어 잡을 수 있는 사람들이 사람을 맞춘다면 얼마나 쉽겠습니까? 지금 현재 우리나라에서 농사짓는 사람들한테 활하고 화살 준다고 해서 50미터 앞에 있는 사람 맞추라고 하면 맞출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 수렵도에 나와 있는 무사들은 움직이지 않는 사람의 경우 100미터 앞에 있어도 맞출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도망가는 노루나 사슴을 쏘아서 잡을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렇다면 기마민족들은 농경민들과 전투 시 거리를 두고 전투를 벌려야 유리하다는 것을 알지요. 활 잘 쏘는데 일부러 쫓아가서 백병전 할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이때 농경민 부대가 쪽수 믿고 쫓아오면 일부러 도망가다가 뒤돌아 포위하여 농경민들을 몰살시켜버립니다. 이것은 정우성 주연의 무사에 잘 나옵니다. 고려인들이 도망가다가 덤비려고 하자, 원나라 기마병들이 순식간에 포위해버리자, 고려인들이 공포심에 질려서 뭉치면 살 줄 알고 서로를 믿고 가운데로 몰려서 싸울 준비를 하는데, 몽골 기마병들이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말 위에서 바로 활을 쏘아 전멸을 시켜버리지요.

 

칭기즈칸 당시 몽골 전체 인구는 100만 명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몽골 군대가 썼던 전술이 바로 유인 작전 후 포위하여 몰아서 몰살을 시켜버리는 작전이었습니다. 농경민 부대도 기마부대가 있었지만 기마 수렵 민족에 비해 말 타는 솜씨나 활 쏘는 솜씨가 월등히 떨어졌지요. 어떻게 말 타고 활 쏘아 짐승들을 잡아먹고 사는 사람들 부대하고 농사짓다가 군대가서 말 타고 활 쏘는 것 배운 사람들 부대하고 그 실력차이가 같을 수 있겠습니까?

 

기마수렵 민족의 기본 전투 전술은 유인 후 포위하여 몰살을 시키는 작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용총의 수렵도가 그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야생 동물들을 상대로 집단사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방에 쏘아서 호랑이나 사슴을 잡을 수 있지만 일부러 소리나는 화살인 명적을 사용하여, 그 명적 앞부분에는 화살촉을 달지 않은 상태에서 일부러 호랑이나 표범이나 사슴을 맞추어 그 짐승들이 도망가게 하여, 말을 타고 쫓아다니면서 활을 쏘면서 몰이 훈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렵도에서 맨 뒤에 있는

이 사람은 고참이나 교관 쯤 될 것이고요!

 

 

쫌 띨빡하게 생겼는데, 이 사람이 저 중에서 고참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일단 조빠지게 안 뛰고 뒤에서 관망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고 머리 위에 쓰고 있는 깃털장식이 수렵도에 나오는 다섯 명의 젊은이들 중에서 제일 많고 화려하다는 것입니다.

 

조빠지게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머리 장식 깃털이 빈약하고 나이가 많이 어려 보입니다. 그래서, 맨 뒤에서 농땡이 치고 있는 조금 더 나이 먹어 보이는 저 친구가 저기에서 지위가 가장 높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화살통에 화살도 그대로 있고요.

 

그리고 그 군사훈련을 겸한 사냥터에 사냥개도 따라서 호랑이를 쫒고 있는데, 개는 호랑이나 사슴에 비해서 지구력이 엄청 강합니다. 호랑이나 표범은 사슴이나 멧돼지를 잡을 때 숨어있다가 기습하여 목줄을 따는 방법으로 사냥을 하는데, 늑대가 조상인 개들은  순록 같이 계절에 따라 대륙을 이동하는 짐승들을 같이 따라 다니면서 뒤처진 놈들을 잡아먹던 놈들이라 지구력에서 호랑이나 표범이나 산속에 사는 멧돼지나 사슴에 비할 바가 아니지요. 그래서 저 사냥터에서 저 사냥개는 말 탄 무사들의 몰이를 돕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소가 끄는 수레가 두 대 기다리고 있는데

이것은 사냥한 짐승들을 싣고가기 위한 운반 수단입니다.

 

 

 

이 것은 말을 타고 사냥개를 앞세워 호랑이나 표범 사슴들을 쫓아다니면서 몰이 훈련을 끝낸 다음에는 기진맥진해 있는 짐승들을 드디어 활로 쏘아 잡아서 싣고간다는 뜻입니다.

 

호랑이 표범 사슴들 같은 산짐승들이 빠르긴 하지만 순발력이 좋을 뿐 지구력은 말이나 개보다 훨씬 더 뒤집니다. 그래서 말을 타고 화살을 쏘면서 쫓으면 처음에는 잘 도망가다가 얼마가지 못하여 지치게 되고 말지요. 이러한 상황 묘사도 이재운의 칭기즈칸에 보면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같은 데서도 호랑이나 표범이나 곰 같은 커다란 맹수들이 사냥개들한테 몰려서 도망가지 못하고 포위 당한 상태에서 사냥꾼을 맞이하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고요. 이것이 바로 그 맹수들이 개보다 지구력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개보다 지구력이 좋으면 총을 든 사냥꾼이 뒤따라 오고 있는 줄 아니까 개를 무시하고 계속 도망갈 것인데, 지쳐서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고 사냥개들하고 실랑이를 하다가 포수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수렵도에서도 몰이 훈련 뒤에는 맨 뒤에 있는 저 고참이 '몰이 훈련 끝내고, 그만 잡아서 가자!' 하면, 사냥개들에 둘러싸여 헐떡거리고 있는 저 짐승들을 저 혈기 왕성한 청춘 무사들이 드디어 화살촉이 달린 화살를 빼어 필요한 만큼 잡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는 소들이 끄는 저 빈 수레에 사냥물을 가득 실어 집으로 돌아갔겠지요.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또 알 수 있는 것은 고구려 사회가 공동체적인 성격이 강한 사회였을 것이란 것입니다. 저 사냥물들을 나누어가졌을 테니까요. 호랑이나 사슴을 보자마자 바로 맞추어 잡은 것이 아니고 몰이를 한 후에 잡은 것들이라, 모두의 공이 포함되어 있어서 마지막에 화살을 쏘아서 죽인 사람이 그 짐승을 독차지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나누어 가졌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무용총에는

사냥터가 아닌 집에도 커다란 개가 한 마리 나옵니다.

 

무용총은 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무용총이라고 하는데, 음식을 나르고 춤을 추면서 잔치가 벌어진 대가집에 손님 같아 보이는 사람 한 명이 말을 타고 들어오는데, 말 앞에 개가 한 마리 있습니다.

 

 

 

말탄 사람 부분을 확대해서 보면  

그 말 앞에 큰 개 한 마리가 쪼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남자는 수염이 나 있고 관직을 상징하는 것 같은 모자를 쓰고 있는데, 젊은이들이 사냥해서 잡아온 고기들로 잔치를 열고 있는 집에 말을 타고 오고 들어오는 것으로 보아,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는지? 초대를 받고 오는 손님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높은 사람임은 틀림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당에 앉아 있는 저 개가 사냥터에 그 개일 지도 모릅니다. 색깔은 다른데, 젊은이들이 고기를 많이 잡아 집으로 돌아왔으니까 개도 따라 집으로 돌아왔겠지요.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고구려의 개들은 사냥개도 있고 집을 지키는 번견도 있었다는 것인데, 고구려인들 자체가 무인 생활을 했으니까 키우는 개들도 사냥개이자 번견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위 무용총 수렵도 속 젊은이들의 집단사냥이

현대식 군대 용어로 [월동준비]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황해도 안악군에서 발견된 [안악 3호분 고분벽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 안악3호분 개 두 마리 분석]

 

황해도 안악군의 안악3호분 벽화에도 개 두 마리가 나옵니다.

부엌과 고기창고 앞에서 개 두 마리가 껄떡거리고 있습니다.

 

 

 

더 선명한 사진으로 보면

집안 여자 두 명은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고

고기 창고에 노루 사슴 멧돼지들이 걸려 있습니다.

 

 

그리고 고기창고를 확대해서 보면 

노루와 사슴과 멧돼지를 통째로 훈제를 만들고 있습니다.

불은 없고 연기만 나니까

바베큐를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훈제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집에는 마구간도 있는데,

말들이 여물을 먹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악 고분에 나오는

[부엌-개 두 마리-고기창고]를 유추하면-

 

말을 타고 사냥해서 잡아온 노루와 사슴과 멧돼지의 내장은 바로 삶아서 요리를 하고, 내장을 빼고 다듬은 몸통들은 보관 기간을 늘리기 위해 훈제를 하는데, 날렵하고 큰 개 두 마리가 부엌 앞에서 껄떡거리고 있는 모습이지요!  화가는 이러한 그 당시의 생활모습을 후세에 알리려고 이런 그림을 사실적으로 그려냈을 것이고요.

 

고구려는 저 당시까지만 해도 수렵사회였고 노루나 사슴이나 멧돼지 사냥을 위해서는 사냥개가 필요했을 테니까, 저 개들도 저 노루와 사슴과 멧돼지를 사냥하는데 따라가서 공을 세운 다음 돌아왔고, 말들은 마구간에 쉬면서 여물을 먹는데 개들은 부엌 앞에서 껄떡거리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안악3호분 벽화에 나오는 저 개들도 평소에는 사람과 같이 생활하면서 집을 지키는 번견이자 사냥 시엔 뛰어난 사냥능력을 발휘하는 [사냥개들]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집  외양간에는 소들도 있는데,

이 소들은 뿔들이 지금의 한우처럼 짧고 굵은 것이 아니라

s자 모양의 긴 뿔입니다. 마치 물소의 뿔 같은 뿔을 가진 소들입니다.

 

 

이 외양간 소들의 뿔을 보면서 우리는 고구려의 막강 병기였던 [각궁]에 들어간 소뿔을 자체 조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활은 하나의 나무로 만든 활이 아니라 소뿔 뽕나무 등 다양한 재료를 합성한 합성궁으로, 활의 탄력을 위해서는 소뿔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이 벽화에 나와 있는 S자 모양의 뿔을 가진 소들이 그 당시 고구려 각궁에 소요되는 소뿔의 공급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무용총 수렵도와 안악3호분 벽화를 종합하면]

 

이상으로 우리는 무용총 수렵도에 나오는 저 집단 사냥이 월동준비(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 차원의 식량 확보의 한 과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어있는 두 대의 수레에 가득 실어갈 정도의 고기를 확보하는 월동준비!

 

사냥개를 동원한 몰이 후 필요한만큼 잡아서는 한 대의 수레에는 부족하여 두 대에 가득 싣고 집으로 돌아와,  가죽을 벗겨서는 외투와 신발과 모자 등을 만들기 위해 말렸을 것이고, 내장으로는 동네 사람들이 잔치를 벌리면서 음주가무를 즐기는 가운데 부엌 앞에서 껄떡거리는 개들한테도 던져줬을 것이고, 고기 몸통은 고기창고에 걸어두고 연기를 피워 훈제를 만들어 보관을 하였겠지요. 안악3호분 벽화에 나오는 것처럼요.

 

 

무용총 수렵도에는 사냥하는 장면과 잔치를 벌리는 장면만 나오고, 안악3호분에는 사냥하는 모습 대신 사냐하여 잡아온 고기들을 요리하고 보관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300년대 중후반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두 개의 고분벽화를 보면 서로 연결하여 당시의 풍습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무용총 수렵도에서 커다란 수레에 두 대나 짐승을 잡아올 정도 같으면 고구려 사회가 말 그대로 수렵 사회였는 것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렵 사회란 사냥을 하여 잡은 고기들이 중요한 식량자원인 사회를 말합니다.

 

몽골이나 부여는 어마어마하게 넓은 초원지대가 있어서 목축업이 발달하였는데, 고구려는 산악지대의 골짜기에 세워진 나라라 초원지대가 없어서 목축업은 성행할 수 없었고 대신 어마어마한 산림이 있어서 그 안에 살고 있는 산짐승들을 잡아서 중요한 식량자원으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수렵도에 나오는 저 집단 사냥의 첫 시기는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오는 시기쯤이었겠지요. 북쪽이라 겨울이 빨리 오고 겨울이 길고, 눈이 1미터 이상 쌓이면 사냥이 어려우니까 낙엽이 지고 무성했던 풀들도 메말라 말 달리기 좋은 시기가 최적의 사냥시기 아니었겠습니까?  지금으로 치면 양력 12월 초쯤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공동체 사회 일원들이 굶어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저 무용총 수렵도에 나오는 20대 전후의 젊은이들은 한 겨울에도 집단사냥에 나가야 했을 때가 많았을 것이고요. 이번에 무용총 수렵도를 자세히 보게 됐는데, 사냥하고 있는 저 무사들은 얼굴에 아직 수염도 안 났습니다. 아직 애들입니다, 애들! 10대 후반에서 기껏해봐야 20대 초중반의 청년들!

 

몽골의 아이들은 걸음마를 떼자마자 말 타는 것부터 배운다고 하는데, 고구려 사람들은 이제 막 10대 후반부터 달리는 말 위에서 뒤돌아서 활을 쏘고, 군사훈련을 겸한 사냥의 효율을 높이기 위하여 명적을 사용하여 야생동물들을 몰아서 잡았고, 그것을 사회 공동체가 나누어가졌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활을 얼마나 잘 쏘았고? 사냥에 얼마나 능했고? 얼마나 잘 뭉쳤고?....... 사냥개가 얼마나 중요했겠습니까?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풍산개는 고구려의 군견이었다]는 주제로 들어가겠습니다.

 

 

 

 

 

원문출처: 티스토리 [풍산개 복실이]

http://pungsangae.tistory.com/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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