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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개들 자료

[북한실체를 밝힌다] 광덕풍산개종견장(4) 고난의 행군시기

 

원문출처: 통일신문

http://www.unityinfo.co.kr/sub_read.html?uid=24739

2018/02/01 [14:52]

기사작성: 김형수 객원기자

 

 

 

인공수정실에 동결 보존하던 우량종 정자들

녹아서 죽고사료먹지 못해 영양실조 걸려

 

 

북한에서 풍산개는 원종과 잡종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원종은 풍산개의 고유한 우량종들을 야생화 시켜 보존해 온 품종이다. 잡종은 북한에서 군견으로 키우던 세퍼트와 다른 유명한 사냥개들을 풍산개와 교배시켜 얻은 품종들이었다.

 

 

1998년 방영북한방송 [풍산개]

이 개들의 후손들이 1999년 남북 야생동물교류사업 때 풍산개 강아지들 4마리가 내려왔고,

2000년 김대중 대통령 평양 방문 당시 두 마리의 강아지들이 내려왔던 것인데,

그래서 그 6마리의 강아지들이 낳은 자견들이 70%나 장애를 갖고 태어난 것이다.

그 개들이 바로 여기서 김형수 객원기자가 밝히고 있는 잡종이었던 것이다.

 

 

1997년 방영북한방송 [동물들의 싸움] 중에서 [사냥개와 멧돼지]

여기에 나오는 개들이 바로 김형수 객원기자가 밝히고 있는

"원종풍산개의 고유한 우량종들을 야생화 시켜 보존해 온 품종"원종인 것이다.

 

 

 

 

원종과 잡종 엄격히 격리시켜 키워

 

양강도 김형권군 광덕풍산개종견장에는 인공부화실이 있는데 여기에서 풍산개의 원종과 잡종을 만들어 냈다. 원종은 풍산개 목장의 사무실에서 내중저수지 쪽으로 향하는 낡은 건물이었다. 잡종견은 그와 반대편인 내중리 소학교(초등학교) 쪽에 위치, 1980년대에 지은 3동의 건물이다.

 

 

 

광덕리풍산개종견장은

원종과 잡종을 엄격히 격리시켜 키웠다.

 

먹이는 하루에 두 번 아미산 총국이 직접 공급하는 사료를 주었는데 주로 새벽시간과 야밤에 주곤 하였다. 사료는 물고기 뼈와 가축의 내장으로 만들어 소시지와 비슷했다. 한 주일에 한 번씩은 살아있는 닭과 토끼를 먹이로 주었는데 이는 풍산개와 풍산개 잡종견들의 야생성을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품을 들여 보존해 온 풍산개종견장은 1990년 초 동유럽사회주의 붕괴와 함께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동유럽사회주의가 붕괴되고 사회주의 시장이 와해되면서 풍산개는 물론 평양과 각 도 동물원들에서 육식동물들에게 공급하던 사료가 바닥났다. 풍산개종견장도 기존보다 질이 낮은 사료가 들어왔고 살아있는 닭과 토끼는 공급하지 못했다.

 

이때부터 풍산개는 우량종 육성보다 품종보존에 더 치우치게 되었다. 하지만 동유럽 사회주의 붕괴는 시작에 불과했다. 김일성 사망 후 북한이 겪어야 했던 고난의 행군은 광덕풍산개종견장을 한순간에 풍비박산 냈다.

 

한국의 많은 전문가들이 북한의 경제가 1990년대 중반 김일성이 급사되면서 악화되었다고 하는데 실은 1980년대에부터 북한의 경제는 서서히 기울기 시작해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열린 1989년을 기점으로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했다. 동유럽붕괴와 체제경쟁을 위한 재정남발,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모순과 김일성 일가의 우상화 선전에 북한의 재정이 모조리 탕진됐다. 이런 가운데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 가을부터 시작된 ‘고난의 행군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다.

 

 

89년 중국 밀수꾼들 풍산개 원종 물색

 

고난의 행군은 노동당 재정경리부 산하 특수기관들과 호위사령부 소속의 아미산총국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속에서도 풍산개종견장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었다.

 

애초 양강도 주민들은 풍산개라는 이름조차 몰랐다. 북한의 다른 지역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양강도의 주민들도 식용견만 키웠던 탓에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장에 풍산개종견장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다. 양강도 주민들이 풍산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말이었다.

 

중국정부는 1983년부터 심전특구에서 제한적으로 시행하던 생산책임제’, 이른바 개혁개방을 전국에 일반화했다. 이때부터 중국에 가족, 친척을 둔 사람들이 서로가 오가며 만날 수 있었다. 1980년대 말 북한에서 쇠절구와 국수분틀이 밀수를 통해 중국으로 유입되고 대신 중국산 담배와 신발이 북한에 들어왔다.

 

중국인들이 밀수 통로를 이용해 살아있는 짐승을 처음으로 요구한 것은 당시 북한에서 대대적으로 키우기 시작한 해리서(뉴트리아)였다. 뉴트리아 새끼 한 마리면 중국인들은 노루의 태를 가지고 만든 보약인 녹태고2통씩 주었다. 12개의 환으로 포장된 녹태고한통은 중국인민폐로 22위안, 당시 중국노동자들의 한 달 월급과 맞먹었다. 그런데 이보다 상상을 초월하는 값을 주겠다는 동물이 있었는데 이는 바로 양강도 김형권군 광덕리에서 키우던 풍산개원종이었다.

 

1989년 중국의 밀수꾼들은 풍산개 원종을 대대적으로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먼저 제시한 가격이 중국인민폐 8백 위안이었다. 당시 양강도 혜산시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는 중국 길림성 장백현 경찰들의 평균 월급이 3백 위안이었다.

 

그때 밀수꾼들이 수소문으로 알아 낸 것이 풍산개의 종견장이 김형권군 광덕리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광덕풍산개종견장은 아미산총국 산하로 김정일의 재산에 속해있었다. 경비도 삼엄해 누구도 접근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만약 풍산개에 손을 대면 이는 김정일의 재산을 훔친 것으로 돼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정치범수용소 행을 면치 못하게 돼 있었다. 이렇게 삼엄한 광덕풍산개종견장도 수많은 인민들이 굶어죽던 고난의 행군을 비켜가지 못했다.

 

 

고난의 행군시작우량종 관리 유지 못해

 

고난의 행군직전이었던 1993년 여름 이곳 풍산개종견장에서는 원종과 잡종을 비롯해 약 3백여 마리의 개를 키우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정전에 대비해 인공수정실과 새끼 보육실에 전기를 공급할 디젤발전기까지 마련돼 있었다.

 

그런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자 풍산개를 지키던 8호안전부 경비대의 식량공급이 중단됐다. 아미산총국은 풍산개의 먹이보장을 위해 8호 작업반에 소속돼 있던 사냥꾼들을 동원해 산토끼와 산비둘기를 잡아 사료를 보충하도록 했다.

 

여기다 계속되는 정전으로 디젤발전기를 돌릴 수가 없었다. 양강도 소재지인 혜산시에서 풍산군까지 360(90km)인데 그곳까지 실어 나를 기름도 없었다. 고장이나 보수를 위해 불가피하게 발전기를 멈춰야 할 시간이 많았다.

 

결국 인공수정실에서 동결 보존하던 우량종 풍산개의 정자들이 모두 녹아 죽었고, 사료를 공급받지 못한 풍산개들은 영양실조에 걸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끔찍한 광경까지 벌어졌다. 배급을 못 받는 경비대원들은 출근을 못했다.

 

오히려 돈을 받고 팔기 위해 경비대원들이 몰래 우량종 풍산개의 새끼들을 빼내기 시작했다. 풍산개종견장의 간부들과 수의사들은 광견병이 돌아 땅에 매장한 것으로 기록하고 풍산개들 중에서 우량종들을 몰래 빼내 밀수꾼들에게 넘겼다.

 

 

1993년 11월 6일 최초로 남한에 들어온 풍산개들 

 고난의 행군이 1994년 가을부터 일어났다고 하니까

그 1년 전에 남한에 들어온 이 개들은 그 이전에 들어온 강아지들로

김형수 객원기자의 판단에 의하면 이 개들이 진짜 원종의 풍산개들인 것이다.

북한 당국에 허락없이 데려온 것은 미안한 일이지만...

그때 데려왔으니까 남한에서라도 지금까지 좋은 풍산개들이 많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이 개들이 바로 만만상사의 개들로

[울산코리아풍산개 농장] [철원 고려풍산개] [신동탄풍산개농장]의 개들이다.

 

 

1998년에 당시에 종견장에 남은 풍산개는 모두 합쳐 24마리였다고 한다. 그중에 순혈종은 3마리만 남고 나머지 21마리는 근친교배나 다른 사냥개들과 교배시킨 저질형 잡종들이다. 남아있는 순혈종 세 마리를 번식시켜도 근친교배밖에 되지 않아 우량종을 얻기 어렵다는 주장이었다.

 

인공수정실에 동결 보존하던 정자들도 모두 훼손돼 풍산개의 우량종은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