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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풍산개들

조선의 국견 풍산개 [북한방송]

 

북한방송 [조선의 국견 풍산개]는 특집 방송으로

2015년 1월 초부터 제작에 들어가

방송국 직원들이 실제로 풍산개 농장이 있는 개마고원 내 풍산 광덕리에 직접 가서

40여일 동안 머물면서 제작하여,

2015년 5월에 북한 방송에 방송되었습니다.

 

정치적인 선전 부분도 있는데,

그런 것은 신경쓰기 마시고 오로지 개하고 개를 키우는 여건하고

현재의 북한 풍산개의 실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시면... 많은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방송내용을 알기 쉽도록 스크랩하였습니다.

 

 

 

 

 

북한에서 풍산개가 천연기념물에서 국견으로 승격됨!

 

 

 

풍산개의 성격

 

 

 

풍산개의 외모 특성

 

 

 

현재 평양중앙동물원 최고의 풍산개 암수

 

 

풍산개는 세퍼트도 이길 정도로 싸움을 잘함.

 

 

 

 

 

 

 

방송 제작팀이 평양에서 비행기를 타고 개마고원에 있는 비행장으로 가면서

개마고원의 풍광과 함께 풍산개의 유래를 설명함.

 

 

 

방송 제작팀이 실제로 풍산 땅 풍사개 사육장이 있는 광덕리에 도착.

 

 

 

 

1963년 최고의 풍산개

1963년 영웅적인 풍산개는 백구가 아니라 재구였음.

 

 

 

1976년 김일성 주석이

우수한 풍산개들을 풍산 광덕리로 보내주었다고 함.

김일성 김정이 부자가 1976년 풍산개들을 데리고 풍산 땅에 사육장을 명령할 때까지만 해도

풍산개는 백구뿐만 아니라 황구도 있었음.

 

 

개마고원에서는 지금도 양을 기르는데

풍산개들이 양을 지키고 모는 일도 하는 양치기 개 역할도 한다고 함.

 

 

 

 

 

 

 

멧돼지 사냥을 보여주려고 함.

 

 

1997년 방송된 [동물들의 싸움]에서 풍산개들이 멧돼지를 사냥하던 장면은

여기 풍산 광덕리에서 촬영한 것이라고 함.

 

 

 

18년 전인 1997년도에 [동물들의 싸움]에서

멧돼지를 사냥하는 풍산개들은 이렇게 늠름한 모습이었음.

 

 

 

 

위 영상은 풍산개 사육장이 있는 풍산 광덕리 사육장에서 촬영한 것인데, 북한방송은 이 개들 중에서 백구만 풍산개로 불러주고 나머지 재구나 황구는 풍산개라고 하지 않고 그냥 사냥개라고만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 영상으로 김정일시대인 1997년까지만 해도 북한에는 다양한 털 색깔을 가진 건강한 유전자의 풍산개들이 다수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풍산개들이 참 다부지고 건강해 보입니다.

 

 

 

 

 

다시, 2015년 조선의 국견으로 돌아와서-

 

 

풍산 광덕리에는 지금도 집집마다 풍산개들을 직접 키우면서

겨울이면 풍산개를 데리고 사냥을 한다고 함.

 

 

 

광덕리 마을 사람들이 각자 자기 집에서 키우는 풍산개들을 데리고

집단적으로 멧돼지 사냥에 나서는데,

개마고원에서는 지금도 마차를 교통 운반수단으로 사용하고 있고

풍산개들이 마차를 따라 사냥터로 달리기 시작함.

아아~ 그런데 풍산개들이 온통 백구들 뿐이고

18년 전인 1997년에 비하여 너무 퇴보해져버린 상태임.

 

 

 

사냥꾼들과 개들이 휴식을 취하는데

이렇게 봐도 1997년도에 풍산개들에 비해 18년 후의 풍산개들은 많이 허약해진 모습임.

 

 

 

도토리가 산에 많이 있어서

멧돼지들이 아래로 안 내려온다고 멧돼지 못잡고 귀가 중.

이때 맨 오른쪽에 백구들 속에서 맨 오른쪽에 재구 한 마리가 보이는데,

풍산개의 백구화 정책으로 18년 전에 비하여 풍산개들이 허약체질로 퇴보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음.

 

 

 

 

[조선의 국견] 동영상으로 바로보기

 

 

 

= 이상 [조선의 국견 풍산개]였습니다.=

 

[끝]

 

 

 

 

 

 

 

 

 

[풍산개의 유래에 대한 재고]

 

북한에서는 풍산개의 유래에 대하여 고구려 시대에 지금과 같은 체모를 갖추었다고 하는데, 복실이 주인장은 고구려 시대 훨씬 이전인 고조선 시대로 생각됩니다.

 

그 이유를 한 번 적어보지요.

 

 

(사진 클릭하면 커짐)

 

 

 

이 지도는 광개토왕 당시 고구려 영토와 비슷합니다.

 

지금도 남북한 휴전선에는 군견들이 많이 있는데, 남한 쪽에는 세파트가 있는 반면 북한 쪽에는 세파트도 있고 풍산개가 군견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고 하니까, 고구려에서도 영토방위에 개들을 군견으로 보냈을 것입니다. 지금이야 전방에 가도 전깃불이 들어와 가로등을 밝히고 있는데, 그 옛날에 캄캄한 밤에 국경을 지키는 경계근무를 설 때 개들이 얼마나 필요했겠습니까? 개마고원에서 키워진 군견들이 고구려 국경선 각 지역으로 보내졌을 것입니다.

 

 

 

이 지도를 보면 고구려 시대의 인구 밀접지역을 나타내는데,

압록강변을 따라서 적석묘가 개마고원까지 연결됩니다.

 

 

 

 

개마고원은 [개마]와 [고원]의 합성어입니다. 

 

 개마= 介馬, 鎧馬 = 갑옷을 입힌 말

 

 

개마는 말에게 갑옷을 입힌다는 뜻으로 말을 군마로 양성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고구려는 3대왕인 대무신왕 때 개마국을 정복하여 그 왕을 죽이고 백성들을 위로하면서 약탈은 하지 않고 군현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개마고원에 개마국이 있었으니까 개마고원은 그 이전부터 군마를 양성하는 군사 병참도시였던 것입니다. 그 덕분에 산속에 숨어 살던 고구려는 만주벌판 북쪽에 있는 부여까지 쫓아가 부여를 멸망시킬 수 있었던 것이고.

 

고서에 보면, [개마국]이 만주벌판 서쪽과 동쪽에 두 군데 있었는데, 동명성왕의 손자이자 유리왕의 아들인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이 정복한 [개마국]은 백두산 남쪽 지금의 개마고원 일대에 있던 개마국입니다.

 

그리고 이때 개마국 할 때  은 현대에서 말하는 것처럼 거대한 나라가 아니라 산맥이나 바다로 둘러싸여 고립된 지역을 뜻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본의 소설 [설국]에서 國도 산맥으로 둘러싸인 특정 지역을 뜻한답니다.

 

그러니까 고구려 시조 고주몽이 만주벌판 북쪽 부여에서 도망쳐 남으로 내려와 백두산 서쪽 산골짜기인 졸본(지금의 환인) 지역으로 숨어들어 오녀산성을 쌓고,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왕이 졸본에서 압록강가로 수도를 옮겨 국내성을 쌓았는데, 유리왕의 아들 대무신왕이 [개마국]을 정복하고 그 이후에 부여는 고구려에 통합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고구려 시대 이전에 이미 백두산 동남쪽에는 군마를 양성하는 병참 도시가 있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단군조선 시대에 이미 고조선에는 대흥안령 쪽에도 군마를 양성하는 [서개마국]이 있었고 동쪽에는 백두산 남쪽에 군마를 양성하는 [동개마국]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조선은 고원에서 말을 타고 내려온 기마족들이 토착민들을 정복하여 세운 나라입니다. 고원에서 말과 청동기를 들고온 무사들이 지금의 만주 요하 같은 강가에 살던 곰족(웅족)과 동쪽의 백두산 속에 살던 삼림족(호족, 호랑이족)을 제압하여, 처음에는 벌판에 사는 곰족만 통합되고 산속에 사는 호족은 숨어버려서, 처음에는 기마족들이 곰족들과만 융화하여 세운 나라가 고조선입니다. 백두산 산맥에 살던 호족들은 그 이후에도 통합이 정말 어려웠답니다. 산속으로 숨어버려서 말을 타고 가도 제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몽골 고원에서 내려온 기마족들은 유목민이자 수렵민족이었는데, 그렇다면 개마국이 생겨날 당시에 말과 함께 그들이 키우던 사냥개들이 들어왔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백두산 남쪽의 개마고원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사실상 완전히 고립되어, 거기에 살던 개들은 그 환경에 토착화되었을 것인데, 고구려 대무신왕 때 이미 개마국을 정복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으니까, 풍산개는 그 역사가 최소한 2천 년은 넘을 것이란 계산이 나오게 되지요.

 

그러면서 풍산개는 그 2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고구려-발해-여진-금-원-청-조선을 거치면서, 사냥개와 번견으로 특화됐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풍산개들은 봄 여름 가을에는 집을 지키고 겨울에는 사냥에 동원되었은 것인데, 사냥개로서도 발전되었지만,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산속 마을에서 집을 지키는 번견으로서의 역할 또한 대단히 중요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청나라의 시조 누루하치는 처음에 백두산 밑에서 모여 살던 부족장이었는데, 이 사람들은 농업도 했지만 겨울이면 사냥이 대단히 중요한 식량자원 확보 수단이었고, 이것은 총이 나오기 전이었으므로 고구려 시대와 거의 다를 바 없었고, 그 사람들은 사냥 자체가 군사훈련이었답니다.

 

그리고 고구려에서 만주 청나라 시대까지 백두산 아래 살던 사냥꾼들은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에서 보듯이 전쟁 시에는 바로 전쟁에 투입되는 무사들이었는데, 사냥꾼들 자체가 무사계급으로 군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풍산개들도 말에 갑옷을 입히는 개마국 당시부터 사냥개이자 군견이었다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군견을 얼마나 철저히 훈련을 시킨다는 것을 많은 분들이 아실 터인데, 말이나 개는 사냥꾼들 이상 잘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지금도 사냥꾼들과 실엽에 직접 투입되는 사냥개들은 그 주인을 엄청 무서워하면서 주인 말이라면 벌벌 길 정도인데, 그것은 개들이 개장수를 무서워하는 이치와 비슷합니다. 사냥개들은 자기 주인이 엄청난 짐승들을 수없이 죽이는 것을 보고 살아가기 때문에 주인한테 잘못 보이면 자기들도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살기 때문에 주인의 말이라면 꼼짝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실이 주인장은 이런 자료들을 근거로, 풍산개들이 헛짖음이 없는 이유가 고조선 당시부터 개마국에서 군견으로 사육됐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개마국은 개마고원 안에서 말을 길러서 만주 평원의 부족들에게 군마로 팔던 부족들이었는데, 개마고원 자체가 병참기지나 병참 도시였고, 거기에 살던 사람들은 수렵을 겸한 무사들이었으니까, 그 사람들은 사냥개를 겸한 군견이 꼭 필요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면 풍산개는 그 당시부터 사냥을 겸한 군견(번견)이었다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년 천의 긴 세월 동안 거기에 살던 사람들은 품질이 떨어지는 개들은 키울 필요가 없어서 틀림없이 도태시키면서 최상의 개를 꾸준히 원하였을 것인데, 그것은 바로 '쓸 데 없이 짖지 말고! 주인뿐만 아니라 같이 모여서 생활하는 사람들한테도 잘하는 사회성과! 노루 정도는 혼자서도 잡을 수 있고, 큰 멧돼지들도 대여섯 마리가 협공하면 잡을 수 있고, 곰이나 호랑이라도 주인을 믿고 찾아내 쫓아가 몰아붙이는 사냥성과! 사냥철이 아닌 봄 여름 가을에는 맹수들로부터 가축을 지키고 집을 지키는 경비 경호 능력!'이었을 것인데, 이것이 바로 현재 풍산개의 특징인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이유들로 지금의 풍산개들이 주인에게 충성스럽고, 주인뿐만 아니라 이웃들에게도 잘하고, 헛짖음이 없고, 사냥능력이 탁월하고, 싸움에는 이악(달려드는 기세가 굳세고 끈질김)한 성격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풍산개는 김정일 정권 당시인 1997년도의 동영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원래는 백구가 아니라 늑대의 체모와 비슷한 개들이 주종을 이룰 수밖에 없었고, 백구는 최근 북한의 백구화 정책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렇다고 고구려 시대에 백구가 없었던 것이 아니더군요. 5세기경 황해도 연탄군 송분리 고분에는 백구가 있는데, 목걸이가 아주 세련된 것으로 보아 부잣집 개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놈은 귀가 선 것이 아니라 귀가 누운 벅구입니다. 그 당시에도 귀가 누운 백구를 선호하는 귀족층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황해도 송죽리 고분]

 

 

황해도 연탄군 송죽리에 있는 고구려 시대인 5세기경 고분 벽화입니다.

 

 

 

화려한 여인

 

 

호랑이 그림

 

 

하얀 개

이 개는 지금 무덤을 지키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귀가 누운 벅구입니다.

 

부산대에서 공개된 6장의 벽화 사진들 속에는 흰개와 붉은 개도 같이 있었다고 하는데,

붉은 개 사진은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가 없네요.